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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갈 일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렌다
2013-02-06 09:18:04최종 업데이트 : 2013-02-06 09:18:04 작성자 : 시민기자   정진혁

"언제... 금요일날 밤에 오냐?"
어머니로부터의 전화였다. 아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설 연휴를 맞아 금요일 밤에 내려올건지, 아니면 토요일에 내려올건지를 물으시는 것이다.

"글쎄요. 애들 학원이 늦게 끝나서... 상황 봐서 학원 하루 빠지라 하고 그날 가는걸로 할게요"
자식이라는 게 제 새끼들 학원 가는 일 때문에 명절날 하루 일찍 가는것까지 늦출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학원을 하루 덜 보내더라도 일찍 내려가겠다고 말씀을 드리자 금세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가신다.

"내려올때 차 조심혀라. 눈이 많이와서 위험한디... 명절날 꼭 덜 사고 나더라"
벌써 아들의 금요일 귀향을 예약해 놓으셨다. 어머니는 둘째인 나뿐만 아니라 형님에게도 전화 하셨을 것이고, 동생에게도 전화 하실게 분명하다.
전화를 끊고 난 1시간 뒤 득달같이 형과 동생에게 확인을 해 본 결과 예상대로였다. 처음부터 아예 금요일날 내려올거냐고 못박아서 물어 보시는 노련함.

생각 있는 아들이라면 당신의 희망사항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수 있기에 빼도 박도 못한채 "네" 하게 된다.
그게 아들 며느리 손주 보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고 정이다.
거기다가 누님과 여동생에게도 친정에 내려올건지 물었을 것이다. 시집 간 출가 외인들이라 굳이 강요는 못하지만 그래도 딸과 사위도 보고싶은건 마찬가지시다. 아들들이 명절 차례상 물린 후 성묘 다녀와서 점심식사 같이 한 뒤 시간에 맞춰 큰아들부터 슬슬 처갓집으로 향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므로 응당 딸들도 친정으로 와 줄것을 믿고 계신 것이다. 이게 요즘의 풍속도니까.

고향 갈 일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렌다_1
고향 갈 일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설렌다_1

고향 마을에는 설과 추석 명절만 되면 이렇게 가고 오는 아들 딸들의 발걸음으로 활기차고 북적인다. 
이미 아이들 울음소리가 끊긴지 오래 되었고, 그나마 가뭄에 콩 나듯 다문화가정을 일군 농가에서 몇 년에 한번씩 농촌 어린이가 탄생을 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구불구불 정겹던 시골길도 이제는 곧게 뻗은 직선도로가 나고 거기에 아스팔트도 입혀져 새로운 신작로가 되었다.
당장 고속도로라도 뚫릴것 같던 변화의 속도감이 정신없이 빨랐지만 농촌의 변화도 90년대 말쯤부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개발이 될만큼 된 것이 그 이유다.

그렇게 격하게 변화를 겪고 난 지금, 고향은 그래도 여전하 내게는 어릴적 유년시절을 보낸 마음의 터전이자 소중한 안식처다. 
누구에게나 마음의 고향은 다 있겠지만 내가 살던 산골짜기의 조그만 시골마을에서의 유년시절은 지금의 내겐 꿈결처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그때 학생수 100여명 안팎의 작은 학교,  완만한 산비탈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층계 논배미가 손바닥만 했으며 가파른 비탈에는 오밀조밀 붙어있던 밭뙈기들이 걸쳐져 있는 조그만 농촌이었다. 

주 농사로는 누에를 키우는 전업농들이 많았다. 누에를 키워서 누에고추를 딴 다음 그걸로 요즘 말하는 실크를 뽑아내는 일이다. 마을에서는 누에고치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다.  누에 농사와 벼농사를 주로 하던 고향 마을은 40호 정도가 오순도순 모여 살던 정겨운 마을이었다. 

그때 누에 농사 짓는 일을 양잠이라 불렀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서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노동력을 요하는 농삿일 이었다. 땡볕에 뽕잎을 따느라 농민들의 얼굴은 벌겋게 그을렸고, 누군가 실수로 뽕밭 근처에서 농약이라도 뿌린걸 모른채 뽕잎을 따다 먹여 그 농가의 누에가 몰살 당해 큰 피해를 입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힘들고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어머니 아버지들은 꿋꿋이 농촌을 지켜가며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냈다.

학교 뒤에는 높은 산이 딱 버티고 있었고 왼쪽은 골짜기의 상류가 있었다. 오른쪽으로 약간 큰 냇물이 소를 이루면서 마을 앞에서 서로 만나 흘러 내려갔다.  냇물 흐르는 소리는 언제 들어도 소낙비 떨어지는 소리로 착각할 만큼 귓전을 맴돌았다. 
유년시절을 거쳐 읍내로 나가 자취생활을 하면서 중학교를 다닌 뒤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해 공부하고 그 뒤로 직장을 잡아 오늘에 이르렀다.

자식들이 나가서 사는동안 노 부모님은 단 하루도 고향을 등지고 떠나보신 적이 없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고향 농가 어르신들이 고향을 지키고 계신다. 지금이야 전부 70대에서 80대 노인들이시고 60대 어르신들은 아주 젊은 청년축에 든다.
당시에 농삿일 하시던 어르신들의 소박한 생활모습을 기억해 내는 느낌은 '사람의 정' 그 자체였다. 들판을 지나 펄펄 뛰놀고 있다 보면 근처 논밭에서 일하는 어른들이 의례히 불러 새참을 먹여주곤 했다. 인심도 참 넘쳐나던 곳이다.

추억을 되새겨 보면 아직 지울수 없는 많은 것들이 서려 있는 그 모습과 느낌들이 아득하게 멀어져 가는데 그나마 지금 고향을 지키고 계신 어르신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그곳은 이제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제 나도 더 늙어지면 그 시절의 향수는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같아 안타깝지만 아직은 나의 젊은 시절을 반추하고 기억을 되살려 향수를 달랠 마음의 고향이 오롯이 남아 있으니 행복하다. 

이제 설을 맞아 콘크리트 주택과 자동차 숲을 벗어나 내려갈 나의 고향, 오늘도 그곳을 떠올려 보며 설레고 행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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