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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배꼽 잡고 웃은 결혼기념일
2013-02-07 12:15:36최종 업데이트 : 2013-02-07 12:15:36 작성자 : 시민기자   오선진
1년전 이맘때쯤으로 기억되는 어느날 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식사를 마친 뒤 TV 리모콘을 붙잡고 거실 소파에 앉으며 본격적인 '휴일 모드'에 들어가자 아내가 슬그머니 다가와 분위기를 잡으며  "여보, 결혼 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요?"라고 물었다.
TV보느라 바쁜 나는 감정의 높낮이 없이 그냥 "뭐? 갑자기 이른 아침부터 웬 결혼전 얘기야?"하자 아내는 "결혼하면 왕비처럼 모신다면서 왕비는 고사하고 오늘... 무슨 날인지 몰라?"라고 재차 되묻는다.

"무슨 날?"
이 상황에서 웬만큼 간덩이가 붓지 않은 남자 아니고선 오금이 저릴수밖에 없다. 적어도 남편이 챙겨야 하는 아내 생일, 결혼 기념일, 혹은 장모님이나 장이어른 생신중 하나 정도가 되니 아내가 그러는게 분명했다.
일순간 손에 쥔 리모콘을 바닥에 슬그머니 내려 놓으며 바짝 긴장하는 날더러 아내가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오늘이 결혼 기념 20주년이거든! 그냥 기념일도 아니고 20주년이거든!"
목에 힘을 주며 목청 높아지는 아내.  아내는 바짝 쫄은 나의 모습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쯧쯧. 내가 속았지. 속았어"라고 쏘아붙인다. 

아뿔싸! 20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을 까맣게 잊고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무슨 바쁜 일이 그렇게 많다고. 얼마나 서운했을까. 오랜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해서인지 결혼기념일만큼은 두 사람 모두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터이기에 더욱 미안했다. 
빠듯한 월급에 자식 키우랴, 시댁 챙기랴, 집안 행사 신경쓰랴 너무 고생이 많은 아내에게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미안. 다시는 이런 실수가 없도록 할게." 아내에게 백배 사죄 하는 순간 괜히 바쁘다는 핑계로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중요한 것을 소홀히 했다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평소에는 밖에 나가 식사 한번정도 하면 끝낼수 있었던 결혼기념일 축하 행사는 그날 토라진 아내 달래느라 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1년이란 시간이 흘러 2013년이 됐다. 
"따르릉~" "여보세요?" 
"여기는 OO비자카드인데요.. 고객님 지금 포인트 적립금이 16만5000점입니다. 7일 후가 고객님 결혼기념일인데 이 포인트로 아내분께 꽃배달 써비스 가능하십니다. 신청하시도록 도와드릴까요?"

아, 또 잊을뻔한 결혼기념일을 이번엔 고맙게도 카드회사가 먼저 챙겨 알려주는게 아닌가. 생 돈 들어가는것도 아니고, 카드회사가 고맙기까지 해서 당연히 "네, 그럽시다. 하하하"했더니 꽃 받을 아내의 주소를 알려달라길래 아내의 회사 주소를 알려주었다.
그러자 그 직원은 "축하 메세지도 해드릴까요?"라고 묻길래 나쁠거야 없을듯 해서 "그러세요"했다.  친구가 권유한 신용카드 하나 만들어 쓰기 시작한게 결정적 순간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리고 며칠전...
"여보, 이게 웬 행복한 시츄에이션? 자기 은근 센스쟁이야!! 호호호"
사무실로 걸려 온 아내의 전화 첫마디였다. 
'웬 센스쟁이?'
아내의 전화에 약간 어리둥절 하며 머리를 굴리던 나는 "아하!" 그제서야 탁상용 달력을 보니 그날이 바로 결혼기념일이었다. 달력에는 대문짝 만하게 표시해 두고선 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카드 회사의 전화. 결혼기념 축하 꽃 배달 해준다는 아리따운 여성의 전화까지. 솔직히 그게 아니었으면 또 까먹고 아내 삐치게 만들뻔 했으니 말이다. 

혼자 배꼽 잡고 웃은 결혼기념일_1
혼자 배꼽 잡고 웃은 결혼기념일_1

덕분에 그 운명의(?) 결혼 기념일 당일 신용카드 회사의 꽃배달이 전해지고, 아내가 내게 전화를 걸어서야 그날이 결혼기념일이란걸 알아챈 것이다. 
이미 아내는 이게 몇 년만인지도 잘 기억이 안나는 선물을, 그것도 다른 직원들 죄다 쳐다 보는 회사에서 커다란 꽃을 받고선 입이 귓가에 걸린채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내 센스를 칭찬했다. 어쨌거나 신용카드 회사가 너무나 고마운 지경이 됐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정말 생각지도 않은, 아니 엄두도 못낼 편지글을 낭독해 줬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 항상 마음만 앞섰지 / 일일이 다 표현 못한 남편이요 /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당신의 눈망울을 보면 / 나는 당신과 매일 연애하는 소중한 시간으로 돌아간다오 / 당신에게 고마움과 사랑을 전하고 싶어요 / 우리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요. / 당신만을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응? 나는 이런 편지 쓴적이 없는데. 이게 진짜 웬 시츄에이션.
정말 센스쟁이는 카드회사였다. 카드 회사가 그런 편지를 인쇄해서 내가 쓴것처럼 배달해 준 것이다. 아내는 그것도 모르고 꽃다발과 함께 내가 써 보낸걸로 알고 감동의 물결에 파묻히고 만 것이다.  
그후 한동안 집안 거실을 차지하고 있던 꽃다발을 보면서 혼자서 속으로 얼마나 배를 잡고 웃었는지.  하여튼 덕분에 맘 놓고 행복하게 실컷 웃은 며칠전의 결혼기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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