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가 발령된 날. 오후 1시 음악분수 시간대를 피하여 만석공원 산책길에 나선다. 몇몇 할머니들이 정자에 누워 여유롭게 부채질을 하고 있을 뿐. 아무도 없다. 영화정 옆. 다리 근처 물가 풀숲 돌 위에 고양이 한 마리가 늘어지게 몸을 내놓고 있다. 산책길에 몇 번 보아온 길고양이다. 어디서 무엇을 먹고 지내는지 모르지만 이 모습 또한 여유롭다. '궁벽한 곳에 조용히 지내는 것을 좋아하니, 숲과 샘물이 흐르는 곳에서 지내는 흥이 여유가 있네.'
슬기샘어린이도서관 옆으로 흐르는 물가에는 크고 작은 거북이들이 돌 위마다 앉아 있다. '시초(蓍草) 그늘에 숨어 지내는 은자요. 연잎에 노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물 밖으로 나와 있다. 두꺼운 갑옷에도 오수(午睡)를 즐기는지, 아니 회의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근처 왜가리는 왔다 갔다 부리로 물속을 훑어내며 무언가를 부리 안으로 넘긴다.
저수지 물가 풀 둥지위에는 물닭 새끼들이 엉켜 있다. 네 마리다. 어미 물닭이 주위를 맴돌다가 저수지 안쪽으로 헤엄쳐 가자 새끼들이 앙증맞게 뒤따른다. 어미가 힐끗 뒤돌아보며 무어라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새끼 한 마리가 물속에 머리를 처박고 잠수한다. 그리고 얼마 후 조금 멀어진 곳에서 머리를 내민다. 잠수 훈련이다. 나중에라도 저수지 관리하시는 분들이 물위의 풀 둥지는 건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 길 옆에 앉아 신발을 벗고 땀내를 확인하려는 순간 비둘기들이 몰려든다. 참새까지 다가온다. 먹을 것을 기대하나 보다. 나는 가진 것이 없어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욱 민망하다. 까치 한 마리가 소나무 밑동에 앉아 평소와는 다른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 나름대로 나무 밑에서 더위를 쫓는 주문을 외는 것 같다.
벚나무, 느티나무에서 매미가 요란스럽게 울고 있다. 매미는 '맵다고 우는 것이 아니고, 쓰르라미는 쓰다고 우는 것이 아니다'. 7년간의 어둡고 긴 땅속생활 그리고 단 2주간의 바깥생활로 생을 마감하는 슬픔을 한 여름에 목청껏 쏟아내는 것이다. 슬픔을 잊도록 술 한 잔 권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자세히 보니 인고의 세월을 지내온 흔적이 나무줄기에 남아있다. 선퇴(蟬退)다. 인간은 이를 한약재로 이용한다.
공원에서의 슬픔은 매미만이 아니다. 공원 조성시기에 심겨진 성 싶은 소나무 뿌리 지표면이 많은 비에 들어났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면 굵은 철사와 타이어 튜브 고무 끈으로 뿌리 부위를 묶어 놓은 모습이 보인다. 뿌리를 옭아맨 고문행위를 용케도 버텨내면서 자란 소나무들이다. 하지만 뿌리를 동여맨 고문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리라.
물가 버드나무 줄기에는 흔히 영지버섯이라 잘못 알고 있는 '도장버섯'이 빌붙어 살고 있다. 물론 죽은 가지이지만, 죽어서도 도장버섯에게 자비를 베푼다. 조금 떨어진 벚나무 줄기에는 '진흙버섯'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색깔이 진흙색이다. 마치 죽은 가지에 누군가 진흙을 뿌려놓은 것 같다. 이들 나무는 죽어서도 버섯들에게 생활터전을 제공한다.
무궁화 꽃이 신기하다. 한 줄기에 적색과 백색 꽃이 함께 피어 있다. 이를테면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동시에 주문한 모습이다. 툭하면 술과 연관시키다니. 이곳에 이런 나무가 다섯 그루 심겨 있다. 어떤 그루는 백색 꽃 모양도 서로 다른 두 종류이다. 그런데 한 그루는 지면의 밑줄기가 여러 개이어서 처음부터 섞어 심었는지도 모른다. 산책길에 호기심 부추기기 십상인 무궁화이지만 이를 즐겨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물가 조그만 시계탑의 시계는 4시 22분을 가리킨다. 세월의 흐름을 막기라도 하듯 멈춰 선지 오래다. 터키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의 시계는 9시 5분에 멈춰있다. 1차 대전 후 터키 멸망의 위기에서 현재의 터키 영토를 지켜낸 케말 파샤. 그가 돌마바흐체 집무실에서 서거하자, 궁전의 모든 시계는 그가 서거한 9시 5분에 멈춰 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다.
"북지상련(北池賞蓮)" 비석 옆 바위들. 마치 고창 고인돌 무리 같다. 기원전 12세기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고인돌. 이곳이 가까워지면 은근히 기대를 한다. 잠시 바위 에 앉아 선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선인들은 즉각 '여유'를 일깨워준다. 바위 무리에서 얻는 성찰이다.
'한 잔 마시고 스스로 즐기는 것이 바로 속세를 피하는 일인데 어찌 반드시 시골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색(李穡)의 유거(幽居)다. 폭염 속 오후. 공원 산책길에 살펴본 동·식·석물들의 유거, 자연의 여유로운 모습들이다. 돌아가는 길.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는 것 또한 여유로운 삶일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