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칼럼] 숙지산 부석소, 선조들은 이 산의 돌들이 비워질 것을 익히 알았다
김우영 언론인
2021-12-06 13:32:05최종 업데이트 : 2021-12-06 13:31:39 작성자 : e수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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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의 산책 코스를 숙지산으로 잡았다. 참 오랜만에 숙지산을 오른다. 20년도 넘은 것 같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보다가 숙지산이 화성 축성에 사용된 돌을 뜬 곳이라는 기록을 보고 그날로 (사)화성연구회 회원들과 답사에 나섰다.
숙지산을 잘 아는 회원으로부터 산 북쪽에 채석장 같은 곳이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무성한 나무와 가시덩굴을 헤치며 산에 들어가 부석소(浮石所:돌을 뜬 곳)를 찾아냈다.
커다란 암벽이 부석소였다. 돌을 뜬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숙지산 부석소(사진=김우영)
숙지산 부석소는 옛 연초제조창 부지에 건립된 화서역 파크푸르지오 길 건너에 있다.
오랜만에 갔지만 부석소가 말끔하게 공원으로 정비돼 있어 찾기 쉬웠다. 아, 그런데 돌 뜬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하아,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비했다. 그런데 안내판을 보니 산 중턱 몇 군데에 그나마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석소 안내판을 보고 서쪽으로 약 40~5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또 하나의 부석소를 찾아갔다. 이곳은 산중턱에 있어서 손을 타지 않고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숙지산 부석소 안내판
여기저기에 돌을 뜬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쌓여 있는 낙엽을 치우고 사진을 찍은 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산책을 하던 사람들이 한두 명씩 말을 걸어온다. 그 바위에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세계문화유산 화성 축성 때 돌을 캐간 곳이며 그때 돌을 뜬 흔적이 바로 이것"이라고 설명해주자 신기하다며 돌뜬 자리를 만진다.
내친 김에 숙지산 이야기도 해줬다.
숙지산이 있는 곳의 옛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이다. 빌 공자, 돌 석자. 채석작업이 시작되면서 돌이 비워졌다는 뜻이다.
1796년 1월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정조대왕은 이곳에 돌이 많이 발견됐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았다. 이에 "하늘로부터 도움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래서 면(面)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孰知)라 했으니, 예로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고 일컬어 왔는데 오늘날 홀연히 셀 수 없이 돌이 나와 축성의 재료가 되게 하여 돌이 없게 될 것을 누가 미리 알고 그런 이름을 붙였던가. 이는 아득한 예전에 미리 정해 놓은 바가 있었음이 그 얼마나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화성성역의궤' 부편2-연설 편)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숙지산은 현재 '孰'자와 '知'를 쓴다. 예전엔 '熟(익힐 숙)'자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익히 알았다'는 뜻이다. 선조들이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익히 알았다(熟知)는 나의 설명에 산책객들은 감탄을 터트리기도 했다.
돌 뜬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또 다른 부석소(사진=김우영)
화성 축성 종합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는 대단한 기록이다. 화성 축성의 전 과정을 총 10권, 9책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제5~6권이 재용(財用)편으로 석재와 목재, 벽돌, 자재를 운반할 수레와 우마(牛馬) 등 기록돼 있다. 심지어는 땔감, 숯, 노끈, 밥숟가락, 항아리, 사발, 됫박, 저울, 주걱, 싸리 비, 솥, 가마니 등에 이르기까지 수량과 구입처, 가격까지 기록돼 있다.
의궤에 따르면 총 공사비용은 모두 87만 3천517냥7전9푼인데 이 중 석재가격은 13만6960냥9전(20만1403덩어리)라고 밝힌다.
수원엔 부석소가 여러 곳 있었는데 각 부석소에서 캐낸 돌은 숙지산 8만1100덩어리, 여기산 6만2400덩어리, 권동 3만2천 덩어리, 팔달산 1만3900덩어리 등 18만9400덩어리로 화성을 축성하면서 가장 많은 돌을 뜬 곳이 숙지산이다.
숙지산 부석소는 수원시 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됐다.
모든 부석소를 발기가 쉽지는 않지만 산책을 겸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보물찾기 하듯 걸으며 찾는 재미도 있으니 이번 주말엔 숙지산으로 가보시라.
* 본 칼럼의 내용은 e수원뉴스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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