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마을 이야기, 파장동 법화당과 괴목정교
정조의 역사와 설화가 풍부한 동네
2023-06-21 14:26:49최종 업데이트 : 2023-06-21 14:58:49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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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장동 법화당. 마을 수호신으로 믿어지던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집이다.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 여행은 이름난 곳을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만큼 경치도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유산도 자랑스럽다. 그런데 가끔 마을 후미진 곳에 만나는 풍경도 감동을 준다. 이런 곳은 구수한 옛이야기가 있고, 그 흔적이 함께 남아 있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에서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특별한 인연을 만나는 기분이 든다. 파장동 법화당도 이런 곳이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는 초입에 지지대 고개가 있다. 고개에서 광교산 쪽으로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데, 여기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시내버스 종점이 나온다. 바로 그 종점 앞에 예스러운 전각이 있는데, 이것이 법화당이다. 오랜 풍상을 겪은 듯한 법화당 옆에서 큰 나무가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버티고 있다. 전각 이름은 법화당이지만, 안내 글 판은 미륵당이다. 글 판에 의하면, 마을 수호신으로 믿어지던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집으로 1959년에 새롭게 단장하면서 '법화당(法華堂)'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맞배지붕으로 골기와를 얹은 사방 3.1m의 단칸 벽돌집이다. 석불입상은 마을의 평안을 빌기 위해 조성됐고, 예로부터 마을 수호신으로 받들었다고 한다. 높이는 약 244cm, 가슴 폭 107cm, 얼굴 길이 114cm 정도의 크기다. 전반적으로 토속적인 조각 수법에 친근감을 주는 특징이 있어 조선 중기 이후 민간신앙과 결합한 미륵 불상으로 파악된다. 1986년 4월 8일 수원시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법화당 단청은 본래의 색이 안 보인다. 풍상을 겪은 듯 집도 전반적으로 낡았다. 현판 뒤에는 명태 한 마리가 몸통과 꼬리 쪽만 보인다. 누군가 최근에 다녀간 것일까. 문에는 양쪽에 벽화가 있는데, 미륵 불상을 지키는 수호신인 듯하다. 붓 자국이 섬세한 것으로 보아 그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우측에는 큰 나무가 법화당을 보호하고 있는 것처럼 버티고 있다. 법화당 맞은 편에는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가 있다. 이 길은 녹음이 풍부하고 아름답다. 좌측 글 판에는 괴목정교와 법화당 관련 전설을 안내하고 있다. 법화당은 굳게 닫혀 있어 내부를 볼 수 없다. 문틈으로 보니 커다란 석불이 서 있다. 석불의 앞에는 단을 놓고 촛대와 제기 등이 놓여있다. 머리는 무엇인가 쓰고 있고, 얼굴은 길다. 부처의 이마에 백호 같은 점처럼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다. 눈썹이 둥글게 올라간 것이 웃는 모습이다. 귀는 길게 늘어져 어깨에 닿았다. 머리와 비교해 신체는 작고 어깨도 좁다. 양손은 가슴 쪽으로 모으고 있다. 미륵불은 화강암으로 상반신만 드러나 있고, 하반신은 거의 지하에 묻혀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안내판(출처를 수원문화원이라고 밝히고 있음)에 전하는 이야기가 있다. 요약하면 임진왜란 때 조선군의 행방을 왜군에게 발설해 조선의 군사들이 화가 나서 미륵의 목을 부러뜨렸다. 목이 잘린 채 방치된 미륵불은 6·25를 겪고 나서 1959년 법화당에 모셨는데, 이때 몸의 일부를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에서 한 것이라고 한다. 괴목정교 표석. 정조대왕이 현륭원 행차길 중요 지점마다 세웠다. 여기 표석은 복제본이고,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있다.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한동민의 글에 의하면 이곳은 미륵당이 있어 미륵고개, 즉 미륵현으로 불렀던 곳이라고 한다.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고 되돌아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으면 수원 땅이 보이지 않으니, 이 고개에서 어가를 멈췄다. 이 고개를 넘어 한양 길로 접어들면 원소가 멀어져 머뭇거렸고, 귀경길이 더디게 진행됐다. 이때부터 고개 이름을 지지대라 고쳐 부르게 했다. 법화당에서 지지대 고개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괴목정교가 있다.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 행차길 중요 지점마다 표석을 세웠다. 18개가 세워졌는데 현재 5개가 남아있다. 그중 하나가 여기 괴목정교다. 괴목정교 표석은 복제본이고, 원본은 수원박물관에 있다. 이곳은 옛길이라 길가에 나무도 나이가 많다. 교량 폭은 13 걸음 정도고, 길이도 17 걸음 정도다. 그렇다면 대략 7~8m와 10m 내외가 된다. 지지대 비각. 이곳은 미륵당이 있어 미륵고개로 불렀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정조가 현륭원을 참배하고 되돌아가는 길이 아쉬움에 더뎠고, 이때부터 지지대 고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안내판에 의하면, 괴목정교가 정조에 의하여 세워지기 전에는 여기서 통행세를 받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세 사람이 이틀 걸러 하루씩 한 냥의 통행세를 받았다. 그래서 이곳을 '한냥골'이라 불렀다. 이들은 거두어들인 통행세로 파장동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아름답고 따뜻한 전설이다. 법화당 탐방 후에 더 공부하기 위해 수원박물관 홈페이지를 찾았다. 여기에서 지지대 장승을 읽었다. 지지대 고개에는 지지대비와 더불어 또 다른 이정표로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지지대 장승은 우리가 잘 아는 '변강쇠가'에도 나온다. 전국 각지의 장승이 모였는데, 여기에 나왔으니 중요한 장승이었던 셈이다. 조선 후기 수원은 장승의 땅이었다. 지지대 장승으로부터 현륭원 원소까지 5리마다 장승을 세웠으니 11곳이었다. 장승을 세운 장소에 대한 기록이 있고, 실제 그러했던 곳은 조선에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많던 장승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현재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파장동 미륵당 마을의 장승을 재현해서 세워 놓은 것이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수원은 장승의 땅이었다. 지지대부터 현륭원 원소까지 5리마다 장승을 세웠다. 현재 수원박물관 야외전시장에는 파장동 미륵당 마을의 장승을 재현해서 세워 놓은 것이 있다. 한때 미륵동으로 불리던 마을은 버스 공영주차장과 음식점, 요양원 등이 있을 뿐 마을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다. 뒷길이라 관리도 제대로 안 되는 측면도 있다. 장승과 괴목정 표석이 사라진 것처럼, 동네에 전해 내려오는 문화도 급속히 사라질 우려가 있다. 마을 문화를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도 기록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특히 장승은 원래 있던 곳에 재현하고, 관련 이야기도 발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런 이야기가 무형유산이고, 미래유산이 된다. 정조, 미륵불, 법화당, 파장동, 괴목정교, 장승, 지지대고개, 현륭원, 윤재열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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