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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산에 깃든 사연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
영광과 오욕의 역사를 돌아본다
2024-10-02 13:08:38최종 업데이트 : 2024-10-02 13:08:35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 화성장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조대왕도 이곳에서 장용영 외영 군사 훈련을 지켜봤다. 늙은 소나무는 지나온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을 초입에 들어선 하늘이 유난히 맑다.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 화성장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정조대왕도 이곳에서 장용영 외영 군사 훈련을 지켜봤다.
늙은 소나무는 지나온 역사를 말없이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을 초입에 들어선 하늘이 유난히 맑다.


  팔달산은 도심에 있다.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산이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산이 도심에 있다 보니 거기에 얽힌 사연도 참 많다. 
 습관대로 화서문에서 서장대로 오른다. 서장대는 화성장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팔달산 정상이다. 이곳에는 정조대왕도 올랐다. 1795년 수원 행차 넷째 날인 윤2월 12일에 이곳에서 장용영 외영 군사 훈련을 지켜봤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훈련을 기념하고자 친히 시를 쓰고 현판에 새겨 여기에 걸었다. 
용도 끝에 서남각루가 솟아 있다. 용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다. 편액에는 화양루라고 쓰여 있다.

용도 끝에 서남각루가 솟아 있다. 용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다. 편액에는 화양루라고 쓰여 있다.


  정조가 화산에 현륭원을 조성하고 팔달산 아래로 수원읍을 건설했다. 이때부터 팔달산은 세상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수원화성을 건설하고, 행궁도 지었다. 팔달산부터 여러 시설물이 지었는데, 산 위에 시설물을 산상서성이라고 한다. 이는 서장대를 중심으로 팔달산 정상에서 남북으로 펼쳐지는 성벽 구간이다.
용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3·1독립운동 기념탑과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 있기 전에 수원 경찰서 순사 노구치 비가 서 있던 곳에 있었다. 당시 비를 허물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용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3·1독립운동 기념탑과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서 있다. 이곳에 있기 전에 수원 경찰서 순사 노구치 비가 서 있던 곳에 있었다. 당시 비를 허물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들을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서장대에서 용도 쪽으로 간다. 용도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통로다. 적에게 빼앗길 때 성안이 노출될 수 있어 서남암문 밖으로 만들었다. 용도 끝에는 서남각루가 솟아 있다. 편액에는 화양루라고 쓰여 있는데 화(華)는 화성, 양(陽)은 산의 남쪽을 뜻한다. 용도 중간에는 좌우에 치성을 만들어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했다. 여기서는 좌우 지형이 급경사를 이루면서도 우뚝 솟아 있어 남쪽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성벽 사이가 좁고 길어 아늑한 느낌이 난다. 
팔달산에 수원화성 축성 당시 돌 뜨던 유적이 있다.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두면 나무가 팽창하는 힘으로 돌이 갈라지며 떠올라 채석했다. 지금도 돌에는 그때 흔적이 있다.

팔달산에 수원화성 축성 당시 돌 뜨던 유적이 있다.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두면 나무가 팽창하는 힘으로 돌이 갈라지며 떠올라 채석했다. 지금도 돌에는 그때 흔적이 있다.


  용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두 개의 탑이 있다. 3·1독립운동 기념탑과 대한민국 독립기념비다. 대한민국 독립기념비는 1948년 8월 15일 수원시민들이 광복을 기념해 동공원에 건립했다. 3·1독립운동 기념탑은 3·1운동 50주년이던 1969년 3월 1일 수원시민들이 매향여중 앞 중포산에 세웠다. 여기는 수원 경찰서 순사 노구치 비가 서 있었다. 노구치는 만세운동을 외치던 시민들을 진압하다가 그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한 일본 형사였다. 일본 순사 비를 허물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순국선열들을 위해 당당하게 기념비를 세웠다.
  몇 달 뒤인 10월 15일 수원시민의 날에 3·1독립운동 기념탑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때 대한민국 독립기념비도 함께 지금 자리로 이전했다고 기념탑 설명 글에 자세히 나와 있다. 순국선열에 대한 희생과 헌신에 고개를 숙이고 다시 길을 나선다. 
팔달산에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 4기가 있다.

팔달산에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 4기가 있다.


  용도 바깥길을 따라 화양루까지 와서 수원향교 쪽으로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니 수원화성 축성 당시 돌 뜨던 유적이 있다. '수원화성 팔달산 채석장'이라는 글 판에 당시 정을 사용해서 돌을 뜨던 공정이 나와 있다. 돌에 구멍을 뚫고,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두면 나무가 팽창하는 힘으로 돌이 갈라지며 떠올라 채석했다. 지금도 그때 구멍이 난 돌이 있다. 산상서성 부근은 돌로 된 부분이 많은데, 팔달산에서 캔 돌로 성을 쌓았을 것이다. 
시민회관은 수원의 문화예술 공연의 뿌리를 내렸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수원신사가 있었다. 일본이 수원향교 머리 위에 신사를 세웠다.

시민회관은 수원의 문화예술 공연의 뿌리를 내렸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수원신사가 있었다. 일본이 수원향교 머리 위에 신사를 세웠다.


  여기서 바로 밑에는 지석묘군이 있다.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 4기가 있는데, 경기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인돌이 보통 거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두 개의 돌을 세우고 큰 돌을 가로 얹어 놓는데, 그런 모양이 아니다. 규모도 작다. 옆에 설명문을 읽어보아야 고인돌임을 알 수 있다. 
  지석묘군에서 작은 길을 따라 내려가면 수원시립중앙도서관과 시민회관이 있다. 도서관은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에서 건립해 수원시에 기증했다. 1980년 7월 2일에 개관했다. 시민회관은 1971년 4월 12일 팔달산에 현재의 모습으로 지어져 수원의 문화예술 공연의 뿌리를 내렸던 곳이다. 음악회와 연극, 무용, 국악 공연은 물론 웅변대회 피아노대회 등 수원시민과 경기도민을 위한 여러 행사가 열렸다. 
매산초등학교. 1910년대 이후 수원역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길을 따라 일본인 회사 등이 들어오고 식민지 도시화가 진행됐다. 자연스럽게 수원에 일본인 거류민들이 증가하고, 학교가 필요했다. 당시 교명은 수원거류민소학교다.

매산초등학교. 1910년대 이후 수원역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길을 따라 일본인 회사 등이 들어오고 식민지 도시화가 진행됐다. 자연스럽게 수원에 일본인 거류민들이 증가하고, 학교가 필요했다. 당시 교명은 수원거류민소학교다.


  팔달산 자락에 이렇게 큰 건물이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곳에 수원신사가 있었다. 일본이 수원향교 머리 위에 신사를 세웠다. 조선의 정신적 상징인 성리학을 짓누르기 위한 행위였다. 교동의 명칭도 수원신사를 따라 궁동으로 바꿨다. 광복 이후 신사는 헐렸고, 동네 명칭도 되찾았다. 
  수원향교로 온다. 안내문에 지나온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1789년(정조 13년)에 왔다. 1795년 윤2월 11일 정조대왕이 을묘년 행차 시 수원향교 참배를 했다. 홍살문 옆 하마비가 고풍스러운 모습으로 앉아있다. 일제 강점기의 치욕을 견디며 꿋꿋이 버텨왔다는 역사를 알리는 듯했다.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1789년(정조 13년)에 같이 왔다. 정조대왕이 을묘년 행차 시 수원향교 참배를 했다.

수원의 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옮기면서 1789년(정조 13년)에 같이 왔다. 정조대왕이 을묘년 행차 시 수원향교 참배를 했다.


  향교 옆에 매산초등학교도 팔달산 자락에 등을 기대고 있다. 1910년대 이후 일본이 우리나라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수원도 수원역에서 팔달문으로 이어지는 신작로가 만들어졌다. 이 길을 따라 일본인 회사 등이 들어오고 식민지 도시화가 진행됐다. 자연스럽게 수원에 일본인 거류민들이 증가하고, 학교가 필요했다. 그게 매산초등학교다. 일본인이 만들었고, 당시 교명은 수원거류민소학교다. 개교 당시에는 일본인만 다녔다. 
  다시 팔달산 회주도로를 따라 오른다. 홍난판 노래비를 지나 성신사에 간다. 성신사는 화성을 지키는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796년 9월에 짓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 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되고 건물도 사라졌다. 2009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복원했다.  
  여기도 사연이 있다. 이곳은 강감찬 장군 동상이 우뚝 솟아 있었다. 성신사 건립을 위해 동상을 광교공원으로 이전했다. 복원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는데, 수원지역 목회자 연합회에서 성신사 건립 반대운동을 했다. 미신을 섬기는 굿당이라고 했다. 다행히 나중에 성신사가 화성행궁과 함께 화성에서 중요한 시설임을 알고 물러섰다는 기사를 읽었다. 
성신사. 화성을 지키는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796년 9월에 짓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 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되고 건물도 사라졌다. 2009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복원했다.

성신사. 화성을 지키는 성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1796년 9월에 짓고,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 강점기에 제사가 폐지되고 건물도 사라졌다. 2009년 화성성역의궤를 참고하여 복원했다.


  회주도로를 걸으면 정조대왕 동상을 만난다. 수원을 건설하고 화성과 행궁을 세운 정조대왕 동상이 팔달산에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장소도 상징성이 있다. 여기에는 화성 건설과 관련된 역사 자료도 새겨 놓았다. 그 자체로 지붕 없는 박물관 역할을 한다. 
  팔달산은 해발 145m 정도로 낮지만, 올라서면 시야가 탁 트여 수원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달산 회주도로는 봄에는 벚꽃길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다. 수원시는 관내 단풍이 아름다운 10대 거리를 선정했는데, 이곳이 들어 있다. 팔달산은 허리 아래 주택단지가 있고 생활체육시설도 있다. 사람들에게 기꺼이 온몸을 내주고, 사람들과 함께 있다. 그런 덕에 산이라는 느낌이 안 난다. 실제로 팔달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일상생활에 지친 시민들이 몸과 마음을 충전하고, 여유를 즐기는 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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