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설경, 장안문에서 북동포루 방향 올해 첫눈이 내렸는데 폭설이다. 폭설이 쏟아지는 아침에 수원화성 장안문으로 갔다. 수원화성, 화성행궁을 해설할 예비 해설사들과 수원화성을 돌아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10시에 장안문에서 만나 북동적대, 북동치, 북동포루, 화홍문, 용연, 방화수류정까지 돌아보며 해설을 했다. 수원화성 설경, 북동포루 주변 예비 해설사들은 열정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실제 현장에서 관람객들에게 해설을 해야 하기 때문에 평상시 궁금했던 사항을 질문했다. 필자는 화성성역의궤, 한글 정리의궤, 화성지, 수원군읍지,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홍재전서 등의 기록을 인용하며 역사적 사실을 위주로 해설을 했다. 기존에 교육을 받아 알고 있을 만한 내용, 일반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처음 들어봤을 만한 내용, 역사적 사실이 왜곡된 내용 등을 위주로 설명을 했다. "현재 장안문 홍예 위 천장인 홍예 개판에는 용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화성성역의궤에는 홍예의 덮개 판에는 구름무늬를 그리고 판 위에는 세 가지 물건(석회, 가는 모래, 황토)으로 고루 쌓았다고 했는데 팔달문도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창룡문을 설명할 때도 홍예 덮개 판 위는 삼물로 했으며 화서문도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수원화성을 축성할 당시에는 홍예 천장에 구름 문양만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수원화성 축성 이후 어느 시점에 용 그림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70년대에 장안문을 복원할 당시에 팔달문 홍예 천장에 용 그림이 있었기 때문에 똑같이 용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1951년 1월 28일 미군이 수원화성 장안문을 통과하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 속에는 1950년 9월 26일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반파된 장안문 누각이 보인다. 장안문 안쪽에서 옹성 밖으로 탱크가 지나갈 때 옹성의 천장인 반자 모습이 보이는데 홍예 반자에는 아무런 그림도 없었다. 1950년 당시에는 장안문 옹성 홍예에는 그림이 없었던 것이다. 수원화성 설경, 북동포루를 배경으로 함께 답사한 해설사들 장안문 옹성 위에 문루가 있는데 수원화성 축성 당시에는 없었다. 당연히 화성성역의궤 기록에도 없다. 1831년 화성유수였던 박기수가 편찬한 화성지에 "북옹성은 장안문의 외성인데 지금 임금님 갑신년(순조 24년, 1824년)에 홍예에 루 2칸을 세웠다"고 했다. 수원화성을 축성한 이후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장안문과 팔달문 옹성 홍예 위에 누각을 세운 것이다. 옹성 위에는 오성지가 있는데 현장 실무자가 시공을 잘못했다. 1795년 가을 정약용 선생이 금정찰방으로 가는 길에 장안문의 오성지를 보고 "오성지라는 것은 물을 터 내려서 적이 성문을 태우려 할 때 이를 막는 것이니 그 구멍을 곧게 뚫어서 바로 문짝 위에 닿게 하여야 쓸모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 쌓는 일을 맡은 사람이 도본 만을 보고 구멍을 가로로 뚫어 놓았으니 이것이 이른바 그림책을 뒤져서 천리마를 찾는다는 격이다."라고 한탄했다. 수원화성 설경 정약용 선생은 정조대왕의 명으로 수원화성을 설계하면서 '성설', '포루도설', '현안도설', '누조도설',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화성의 기초를 닦았다. 하지만 실제 수원화성을 축성할 때 현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의문점이 생긴다. 여러 억측이 있지만, 기록이 존재하지 않아 알 수는 없는 상황이다. 오성지가 잘못 시공된 것도 이런 이유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폭설을 뚫고 북동포루로 갔다. 오랜 기간 수원화성을 답사하면서 이렇게 많은 눈을 맞으며 성곽길을 걸은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수원화성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눈이 내릴 때라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설경 속에서 성곽길을 답사하니 해설사들도 너무 행복해했다. 눈을 뒤집어쓴 나무와 성벽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었다. 수원화성 설경, 용연 뒤로 보이는 동북포루 해설사는 "수원화성 중에서 복원이 잘못된 건축물이 바로 포루(砲樓)입니다. 수원화성에는 북동포루, 북서포루, 서포루, 남포루, 동포루가 있습니다. 화성성역의궤 기록과 실제 시공된 모습, 1970년대 복원한 모습에서 많은 차이를 볼 수 있는데, 1920년대 전후의 사진과 비교해보면 총혈의 위치와 수, 총안의 위치와 수, 전안의 수 등이 다르게 복원되었습니다. 차후 해체복원 할 때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기를 바랍니다. 몰라서 잘못 복원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고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용연으로 가는 길에 방화교(訪花橋)가 있다. 다리 이름을 짓는데도 인문학적 배경이 있어야 하는데 방화교는 몰상식한 이름이다. 원래 '방화수류정'이란 이름의 유래는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이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방화수류'를 하나의 의미로 볼 수 있는 것인데 이것을 뚝 잘라 '방화'라 지은 것이다. 당연히 '방화수류교(訪花隨柳橋)'라고 해야 한다. 수원화성 설경, 용연 뒤로 보이는 방화수류정과 화홍문 용연에서 바라본 동북포루와 방화수류정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능수버들 가지가지와 소나무에 쌓인 눈이 주변 풍광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여기서는 어느 위치, 어느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아름다운 그림이 되었다. 폭설을 뚫고 수원화성을 찬미하다 보니 2시간이 훌쩍 넘었다. 수원화성에 대한 열정이 수원화성을 널리 알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수원화성, 설경, 방화수류정, 장안문, 북동포루, 화홍문, 한정규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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