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수원에서 고려 이야기를 듣다
광교산 ‘수원 창성사지’를 찾아서
2024-12-13 10:30:41최종 업데이트 : 2024-12-13 10:30:40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수원에서 조선 시대 이전 고려 시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수원에서 조선 시대 이전 고려 시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수원은 정조대왕이 만든 신도시다. 수원화성이 있고, 행궁이 있다. 수원 향교와 화령전 등이 모두 정조대왕 이후의 유산이다. 그러니 역사적 삶과 이해도 이 유적지를 중심으로 응집된다. 

  수원에서 조선 시대 이전 고려 시대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는 곳이 있다. 화홍문에서 방화수류정으로 오르는 길이다. 여기(팔달구 매향동 13-1)에 비각이 있는데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1963년 1월 21일 보물 지정)다. 창성사는 광교산 비로봉 서쪽 계곡에 있었다. 절터에 탑비가 있었는데 방화수류정 옆에 보호각을 설치하고 이전하였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절터가 궁금했다. 광교산에 있다는데 자주 가는 등산로에는 없었다. 그러던 차에 김우영(시인, 화성연구회 이사) 선생을 만났다. 김 선생은 연구회에서 답사를 다녀왔다. 해서 절터 찾아가는 길을 물었다. 그랬더니 혼자 찾기 힘드니 함께 가자고 한다. 

절터는 잡풀로 뒤덮여있다. 수풀에 가려진 축대가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절터는 잡풀로 뒤덮여있다. 수풀에 가려진 축대가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광교산 입구 반딧불이 화장실을 지나 13번 버스 종점에 다다랐다. 늘 다녔던 등산길이다. 그런데 오늘은 등산길로 안 가고 개울을 건넌다. 등산길이 아니라 산길이다. 길은 험하지 않고 그럭저럭 갈만하다. 언뜻 봐서는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인데, 다닌 흔적이 보인다. 산에 왔던 사람들이 소원을 빌며 돌을 쌓아 놓았다. 돌탑을 지나자 가파른 산비탈이 가로막는다. 숨이 차오르고 발길은 더디다. 비스듬히 서 있는 나뭇등걸을 부여잡고 올랐다. 다행히 산의 정경이 지루하지 않아 힘을 덜며 오를 수 있었다.

절터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덩이들이 보인다.

절터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덩이들이 보인다.


  40여 분을 오르니 산기슭에 넓은 터가 보인다. 순간 마음속 기대하고 있던 절터 장면이 무너진다. 실망감이 몰려왔다. 절터는 온통 잡풀로 뒤덮여있다. 수풀 사이에 축대가 보이고,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덩이 몇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수원 창성사지'와 '수원 창성사지 유적 현황도'만이 햇빛을 받으며 폐허가 된 절터를 지키고 있다.

  땅에 낙엽을 파헤치니 깨진 기와 조각이 바로 드러난다. 몇백 년을 차디찬 땅속에 파묻혀 있었는데, 제법 온기를 느끼게 한다. 창성사는 고려 시대에 창건되고 19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한다. 국사가 있었던 절이니 건축양식도 화려했을 것이다. 유교 국가인 조선 시대도 당당하게 있었다니 위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남아 있는 건물터 5단과 축대와 외형만 당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본당이 둥지를 틀었을 듯한 자리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풍광이 아름답다.

땅에 낙엽을 파헤치니 깨진 기와 조각이 드러난다. 기와 조각 등은 창성사 창건연대 등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다.

땅에 낙엽을 파헤치니 깨진 기와 조각이 드러난다. 기와 조각 등은 창성사 창건연대 등을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다.


  절터를 구경하고 돌아올 때는 상광교동 마을로 왔다. 산의 품을 파고든 길은 부드러웠다. 동행한 김 선생이 "사람들은 옛날에 이 길로 부처님께 공양을 드리기 위해 다녔을 것이다."라고 상상력을 발휘한다. 물결치는 산봉우리들을 뒤로 하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니 작은 마을이다. 황소들이 있는 축사도 있다. 도심에서 보기 힘든 모습이다.

  마을 입구에 수호신처럼 서 있는 나무가 있다. 느티나무(상광교동 130번지)는 1982년 지정 당시 500년이 되었다. 지금은 542년의 나이를 먹었다는 뜻이다. 오랜 세월을 버텨왔는데 건강한 모습이다. 나뭇가지가 휘지도 않고 곧게 자랐다. 

  큰 절터에는 사찰과 관련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데, 여기는 이 나무에 있다. 한 승려가 창성사 마당에 지팡이를 놓고 불공을 드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다시 돌아와 보니 그 지팡이에서 새싹이 돋아 큰 나무가 됐다는 이야기다. 수원시가 오래된 나무의 역사, 크기, 문화 등을 담은 도감 《수원의 오래된 나무 이야기》에 있는 이야기다. 

절터에 안내판. 창성사지 설명과 발굴조사 현황을 그려 놓았다.

절터에 안내판. 창성사지 설명과 발굴조사 현황을 그려 놓았다.


  창성사지는 1986년 수원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됐다. 그러다가 2017년에 경기도기념물 제225호로 승격됐다. 지정 당시 고려 시기 사찰로 건축적 연구 가치를 보유한 유적으로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크다고 했다. 

  이런 절터가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산 중턱에 있어 접근이 어렵다 보니 주기적 관리가 쉽지 않은 듯하다. 방치도 훼손이다. 지금이라도 정기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 시민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방문길을 안내하고 길 안내 팻말도 세우면 좋겠다. 입구에 느티나무도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하면, 창성사지 문화 콘텐츠가 된다. 

절터로 오르는 마을 입구에 보호수. 창성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하면 창성사지 관련 문화 콘텐츠가 된다.

절터로 오르는 마을 입구에 보호수. 창성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하면 창성사지 관련 문화 콘텐츠가 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비문 설명이 있다. 탑에는 고려 말 승려 진각국사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했다. 진각국사의 이름은 천희다. 여러 사찰을 돌아다니며 수행했고, 1364년에는 원나라에 다녀왔다. 치악산에 은거하였는데, 1367년 5월에 공민왕이 국사로 추대했다. 1382년 창성사에서 76세에 입적하였다. 우왕이 시호를 진각국사, 탑 명을 내렸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 이색이 비문을 지었다. 

  위키 실록 사전에 의하면 창성사 창건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때 진각국사 천희가 입적한 절이니, 이 시기에 흥성한 절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시대 1407년(태종 7) 12월에는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 자복사찰은 나라의 안녕과 고을의 복을 빌기 위해 지정한 사찰이다. 이로 창성사가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명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신대학교가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조사를 할 때 기와 등이 나왔는데, 이를 근거로 볼 때 18세기 후반에 중수했다가 19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본다.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광교산, 수원 창성사지, 절터, 정조, 수원화성,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윤재열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