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보기
정조의 정신을 따라 수원화성을 걷는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힘을 준다
2025-01-02 13:54:26최종 업데이트 : 2025-01-02 13:54:24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화양루. 정조는 수원화성 완공 이듬해 1월에 성을 순행했다. 그때 화양루에서 시작했다.

화양루. 정조는 수원화성 완공 이듬해 1월에 성을 순행했다. 그때 화양루에서 시작했다.


 새해 수원화성을 찾는다. 성곽을 둘레길처럼 자주 다니지만, 새해에 나서는 길은 느낌이 다르다. 마음가짐을 다지는 엄숙함이 있다. 정조도 수원화성 완공 이듬해 1월(음력)에 성을 순행했다는 기록(정조실록, 1797년)이 있다. 정조의 정신을 되새기며 걸어본다.

 당시 화양루에서 시작했다는 기록을 따라 걷는다. 화양루는 팔달산 정상에 가깝다. 정조는 조심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밝혔듯이 '뚱뚱한 사람'이다. 이런 몸을 이끌고 다시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만큼 화성에 애정이 많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화양루에서 서장대는 간다. 팔달산 정상에 서장대는 화성장대 현판이 걸려 있다. 정조는 1795년 수원 행차 넷째 날인 윤2월 12일에 이곳에서 장용영 외영 군사 훈련을 지켜봤다. 그리고 훈련을 마치고 만족스럽고 기쁜 마음을 시로 표현하고, 현판에 새겨 걸었다. 화성장대 현판 글씨도 썼다. 왕이 지은 글과 왕이 쓴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세금과 노역 쓰지 않았네/성곽은 평지를 따라 둘렀고, 먼 하늘 기댄 장대는 높다랗구나/많은 성가퀴 구조 굳건하고, 군사들 의기 호기롭네/대풍가 한 곡조 연주함에, 붉은 햇살이 갑옷을 비추는구나'

 현륭원 참배를 마친 그날 밤 정조는 황금 갑옷으로 갈아입고 서장대에 올랐다. 밤하늘에 포성이 울리고, 사대문에서는 깃발이 나부낀다. 저 아래로 보이는 신도시 화성의 모습이 장관이다. 세금과 노역 쓰지 않은 것에 자긍심을 느낀다. 짧은 시구에 화성 건설하면서 느낀 감회가 세차게 치밀어 오른다. 
 
화성장대. 수원화성에서 유일하게 왕이 지은 글과 왕이 쓴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성장대. 수원화성에서 유일하게 왕이 지은 글과 왕이 쓴 글씨 현판이 걸려 있다.


 화성의 가치는 여럿이 있는데, 부역 대신 임금을 지급해 일의 효율을 높인 것도 들어간다. 신분이 아닌 역량에 따라 임금을 줬다. 성과급이라는 혁신적인 방식이다. 특히 석공, 목공, 미장과 같은 특정 기술을 가진 노비는 그렇지 못한 진사보다도 임금이 몇 배나 많았다. 지금도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별하는 상황이 많은데, 당시에는 정말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신분사회의 틀에서 평등사회를 꿈꾸던 것을 실현했다. 

 화서문을 지나면 서북공심돈이 있다. 여기에서 정조는 "공심돈은 우리 동국의 성제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는 마음껏 구경하라."라고 말했다. 이 시설은 서북쪽 성벽이 꺾이는 위치에 당당하게 서 있다. 치성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들이 감시하는 망루이고, 화포를 쏠 수 있는 공격 기능도 있다. 정조가 신하들 앞에서 만족스러워했던 이유는 이는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시설이기 때문이었다. 

서북공심돈. 정조는 공심돈은 우리 동국 성제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라며 신하들에게 마음껏 구경하라고 말했다.

서북공심돈. 정조는 공심돈은 우리 동국 성제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라며 신하들에게 마음껏 구경하라고 말했다.


 저 앞에 장안문이 우뚝 솟아 있다. 한양에서 올 때 처음 맞이하는 문이다. 북쪽에 자리했지만, 수원화성 정문에 해당한다. 정조는 장안의 의미를 '북쪽으로 서울의 궁궐을 바라보고, 남쪽으로 현륭원을 바라보며 만년의 편안함을 길이 알린다.'라고 풀이했다. 장안문은 남문인 팔달문과 더불어 화성에서 가장 웅장하고 높은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한양 숭례문보다도 더 크다. 이런 것으로 보아 정조가 생각하는 수원화성의 위상이 짐작이 간다. 

  장안문을 지나 방화수류정이다. 여기서는 조그만 과녁을 설치하고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정조는 화살을 세 번 쏘아 다 맞힌 뒤 신하들에게도 활쏘기를 명했다. 정자 아래에서 구경하는 백성들을 보고 수원부 유수 조심태에게 명해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서 활쏘기를 시험하게 한 다음 1등을 한 1인에게 바로 전시(임금이 친히 치르게 하던 과거)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고 풍악을 내려서 보냈다.

장안문. 한양에서 올 때 처음 맞이하는 문이다. 한양 숭례문보다도 더 크다. 이런 것으로 보아 정조가 생각하는 수원화성의 위상도 짐작할 수 있다.

장안문. 한양에서 올 때 처음 맞이하는 문이다. 한양 숭례문보다도 더 크다. 이런 것으로 보아 정조가 생각하는 수원화성의 위상도 짐작할 수 있다.


 신하들에게는 술을 내리고 임금이 칠언소시를 지은 뒤, 신하들에게 화답해 올리라고 명했다. 이때 채제공이 지은 시가 있다. 

 "용 깃발 나부끼고 버들가지 하늘하늘/성안 가득 봄기운 완연하여 아름답고/군왕께서 정자 앞 곧추서서 활을 쏘니/화살 꽂힌 붉은 과녁 꽃송이 다름없네"

 용 깃발은 군왕을 상징한다. 엄숙한 분위기에도 봄기운은 아름답다. 여기에 당당하게 활을 쏘는 모습은 더욱 빛난다.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이 마치 붉은 꽃처럼 보인다. 짧은 시구에 아름다운 봄이 가득하다. 임금과 신하의 놀이에는 격조가 풍긴다. 한 폭의 그림보다 더 선명한 글이다.

  연무대로 간다. 여기서 정조는 동장대에 올랐다.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의 성은 전체가 둥글어서 모서리가 없다. 그래서 성 위에 담벼락처럼 죽 둘러서서 지켜야만 비로소 적을 방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새로 쌓은 성은 처음으로 치첩의 제도를 도입했다."라고 했다. 성을 둘러보고 치첩의 기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치첩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다. 적의 동태를 살피고 공격하기에 편하다. 

 정조는 순행을 마치고 행궁에 돌아와 특별한 하교를 한다.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화락하게 하는 것[戶戶富實 人人和樂]'이다. 말 그대로 백성이 편안하게 사는 정책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방화수류정. 여기서 정조는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방화수류정. 여기서 정조는 신하들과 활쏘기를 했다.


 정조는 수원을 군사적 용도의 방어 도시로만 설계하지 않았다. 백성이 부유하고 즐거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도시 건설을 꿈꿨다. 이게 통치자의 역할이자 사명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자급자족하는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탕평책을 펼치며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기도 했다. 

 화성에는 정조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있다. 평등한 세상을 위해 결연한 의지와 용기를 보였다. 노론과 수구 세력의 거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다. '인인화락'은 꿈의 결정체다. 

 수원 성곽은 시민에게 쉼을 주는 둘레길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시민의 삶을 편안하게 어루만져 주지만, 가끔 우리를 새롭게 하는 힘을 준다. 정조대왕의 위민정신과 개혁 정신이 집대성된 수원화성을 걷는 프로그램은 어떨까. 성곽을 천천히 걸으며 정조의 정신을 새겨 보는 것이다. 시민에게 인문학적 감수성을 높여주는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되지 않을까.  
윤재열님의 네임카드

수원화성, 정조, 화성행궁, 방화수류정, 화양루, 서북공심돈, 윤재열

연관 뉴스


추천 0
프린트버튼
공유하기 iconiconiconiconiconicon

독자의견전체 0

SNS 로그인 후, 댓글 작성이 가능합니다. icon icon


 

페이지 맨 위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