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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향교와 교회들이 더불어 사는 동네
앞서간 근대에 말을 걸어본다
2025-01-14 13:38:29최종 업데이트 : 2025-01-14 13:38:27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대한성공회 수원교회. 하얀 종탑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대한성공회 수원교회. 하얀 종탑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230년 전 1795년에 정조는 7박 8일 일정으로 수원화성에 행차했다. 그 해는 어머니 혜경궁홍씨와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맞는 해다. 아버지 묘소를 전배하고, 어머니의 회갑 잔치를 열면서, 양반과 노인 및 일반 백성들을 위한 다양한 행사를 계획했다. 

  수원에 온 셋째 날(윤2월 11일) 아침 일찍 정조는 향교에 갔다. 공자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나가 전배했다. 그때 길이 행궁에서 향교로 간 길이 지금의 교동이다. 이 길은 일제강점기에는 수원역으로 가는 길과 연결된다. 역으로 가는 길에는 부국원 건물을 비롯해 근대 시설이 다양하게 들어와 수원의 중심지가 됐다. 

  중심지였던 흔적은 교회도 있다. 행궁동 공방 거리에서 오다 보면 제일 먼저 한국기독교 장로회 수원교회를 만난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돌로 지은 예배당이 서 있다. 돌벽은 색깔이 바래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은 돌벽 건물을 보고 '돌교회', '돌집교회'라고 불렀다.

입구 왼쪽에 교회 약사와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 봉사한 수녀와 선교사 보육원 원장의 기념 빗돌이 나란히 있다.

입구 왼쪽에 교회 약사와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 봉사한 수녀와 선교사 보육원 원장의 기념 빗돌이 나란히 있다.


  수원교회는 수원 최초의 한국기독교 장로교회다. 누리집에 보니 1946년부터 예배를 드렸다. 1956년에 현재 건물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교육관 등을 새로 지었지만, 돌로 지은 예배당은 여전히 가운데 우뚝 서 있다. 예스러운 모습이 시골 농촌에 있는 교회를 떠올리게 한다. 

  김우영(수원일보 논설실장) 씨는 "서슬 퍼렇던 독재 정권 시절, 이 교회는 시국 집회와 강연이 열리던 공간이었다.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인사들의 기댈 언덕이자 피난처이기도 했다. 6.10 민주화 항쟁 때는 이 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교인들도 시위에 대거 참여했다."라고 회고한다. 어쩐지 교회의 단단한 겉모습이 어둡고 암담한 시대를 의연하게 견디며 지나온 듯하다. 

한국기독교 장로회 수원교회. 색깔이 바랜 벽돌이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은 '돌교회', '돌집교회'라고 불렀다.

한국기독교 장로회 수원교회. 색깔이 바랜 벽돌이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주변 사람들은 '돌교회', '돌집교회'라고 불렀다.

  수원교회를 지나 향교 쪽으로 가면 큰 교회가 팔달산에 기대어 있다. 대한성공회 수원교회다. 입구는 누구나 들어오라고 넓게 팔을 벌리고 있다. 왼쪽에 '성스테반 성당 약사'라는 돌에 역사가 새겨 있다.

 1904년 영국에서 초대 주교로 부임한 고요한 주교가 세웠다. 1908년 진명학교와 진명유치원을 설립해 지역사회 인재 양성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13년에는 서울에 있던 성피득보육원을 옮겨 와 1973년까지 60여 년 동안 사회복지 사업을 했다. 옆에는 수녀와 선교사 보육원 원장의 기념 빗돌이 나란히 있다. 모두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헌신 봉사한 사람들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수원교회. 현대식 건물이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수원교회. 현대식 건물이 높은 곳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다.


  교회 왼쪽에는 하얀 종탑이 시선을 압도하고 있다. 교회 외형은 붉은색 벽돌이 많은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붉은 벽돌 건물이 한눈에 예배당임을 알 수 있다. 1981년에 세웠다고 기록을 달고 있는데, 낡은 느낌은 하나도 없다. 

  높은 곳에 있는데, 예배당은 다시 계단을 두 번이나 꺾어서 올라야 한다. 신성함을 강조하는 의도가 있는 듯하다. 지붕이며 창문 등 건물 여기저기가 성당 이미지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술적 가치도 있겠지만, 신도들이 흠모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는 건축 양식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수원교회는 아예 팔달산 중턱에 앉아 있다. 교회 누리집에 보니 교회 시작은 1928년이다. 거의 100년의 역사를 지나왔다. 근현대사를 지나면서 지역민과 고락을 함께했다는 의미다. 화단에 교회 건축 현황 글 판이 있는데, 2019년에 완성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 앞에 돌도 전시되어 있는데, 터파기 공사 중에 나온 것이라고 쓰여 있다. 대리석 예배당은 지나간 역사의 힘을 자랑하듯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빛나고 있다. 

  성결교회 주차장에서 내려오면 좁은 골목에 수원중화기독교회 간판이 붙어 있다. 담에 교회 설명이 있는데, "1945년 해방 이후 산동성, 강소성, 대만 등지에서 수원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예수를 본받고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자 1955년 7월 22일 마수신 형제가 헌당하여 한국 내에서 네 번째로 세운 교회다. 최근 교인은 해방 직후 이주한 세대와 함께 수원지역으로 직업을 찾아온 젊은 세대로 구성되어 있다."라고 쓰여 있다. 
 
수원중화기독교회. 작고 보잘것없는 교회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기에는 충분한 듯하다.

수원중화기독교회. 작고 보잘것없는 교회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기에는 충분한 듯하다.


  빨간 기와지붕에 대문도, 초록색 간판도 모두 낯설다. 닫힌 문 안으로 감나무가 밖을 내다보고 있다. 집은 담쟁이넝쿨이 감고 있어 나이를 짐작게 한다. 작고 보잘것없는 교회지만 마음이 힘든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조선 시대는 유교 국가다. 더욱 교동에는 유교 성전인 향교가 있다. 이런 곳에 교회가 들어와서 함께 했다. 사실 지금도 지역에는 향교 앞에 교회 신축을 하는 것에 갈등을 겪고 있다. 교동은 그런 갈등이 없었나 보다. 이질적인 부분이 많은데 함께 했다는 것이 따뜻하게 다가온다. 

  교동은 귀중한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저마다 가치 있는 것들이 어울려 있다. 지나간 세월은 잊기 쉽지만, 다시 얻기 어려운 것은 틀림없다. 과거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까. 은은히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를 아슴푸레한 기억으로 찾아낼 수 있을까. 시간이 머물러 있는 거리에 서성이며 말을 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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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향교, 교회, 근대, 부국원, 행궁동, 정조,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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