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림을 주고 간 수원 여성들, 당신들을 그리워합니다
수원에서 빛난 여성들을 생각하며
2025-03-13 17:04:50최종 업데이트 : 2025-03-13 17:04:46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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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는 입구에 '산우리 영웅들' 표지판. 독립운동가 이선경, 이현경 자매 설명이 있다. 수원 화성 성곽길을 자주 간다. 성곽 시설물이 하늘로 뻗어 있고, 행궁도 평온한 분위기다. 행궁 광장에서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도로에는 차가 많다. 3월인데 사람들이 옷차림이 가볍다. 봄이면 으레 꽃샘추위가 있는데 그것도 볼 수가 없다. 엊그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고, 금방 봄이 왔다. 참 세월이 빠르게 흐른다. 이런 생각을 휘젓다 보니 며칠 전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유엔에서 정한 날인데, 우리나라는 법정기념일로 지정해 기념하고 있다. 수원시도 사회학자를 초청해 여성의 날 특별강연을 열었다. ![]() 1919년 3월 김향화는 기생들을 이끌고 수원경찰서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수원을 빛낸 여성은 누구일까. 수원에서 빛나는 여성은 누구일까. 행궁을 걷다가 생각한 탓인지 혜경궁홍씨가 떠오른다. 10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고, 28세에는 동갑내기인 남편 사도세자와 사별한다. 조정의 권력 투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이후에도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아들 정조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아들 정조는 임금 자리에 올랐다. 아들과 수원에 왔다. 남편 사도세자를 만나고, 화려한 회갑연도 했다.
조선 시대에 왕실 여인은 바깥출입이 제한적이었다. 혜경궁홍씨는 임금인 아들과 궁 밖 여행을 했다. 파격적인 행보다. 혜경궁홍씨는 왕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여성으로 이야기 중심에 섰다. 혜경궁홍씨는 수원의 역사에 기록되고, 지금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 나혜석. 수원 출신으로 화가, 작가다. 여성으로 조선 최초로 세계 일주 여행을 했고, 남성 중심사상이 견고한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이곳에서는 김향화 선생이다. 일제강점기에 행궁 봉수당은 자혜의원이 설치되었다. 1919년 3월 29일은 수원 기생조합 기생들이 자혜의원으로 위생 검진을 받으러 가던 날이다. 일제는 기생들을 창기 취급하여 매주 토요일 위생 검사를 받도록 강요했다. 기생들은 일제의 보건 정책이 부당하다고 수원경찰서 앞에서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때 김향화는 선두에서 기생들을 이끌었는데,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화성행궁에서 나와 우측으로 걸으면 공방 길에 들어선다. 이 길을 가다 보면 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는 입구를 만난다. 여기에 '산우리 영웅들'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 이선경, 이현경이 보인다. 이선경은 1902년 수원면 산루리에서 태어났다. 산루리는 화성 화양루 아래에 있는 곳으로 지금의 교동 지역이다. 그는 이곳에서 서울로 통학하며 공부했다.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 학생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구속됐다가 무죄로 풀려났다. 1920년 8월 9일 상해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경성에 머무르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당했다. 구류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9일 뒤 세상과 이별했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 때문이었다. 그때 나이 19살이었다. 사진도 하나 남기지 못하고 갔다. ![]() 용담 안점순 흉상.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다. 어린 날 끔찍했던 기억을 딛고, 평화와 인권을 전파하는 활동가로 살았다. 1920년대는 남성 중심사상이 강하던 때다. 이때 어린 나이에 나라를 찾기 위해 저항했다는 사실은 엄청나게 큰 사건이다. 수원 딸로 겨레의 별이 된 것이다. 19살 나이에 대한독립을 꿈꾸던 이선경을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연구사는 수원의 유관순이라고 했다.
이선경의 언니 이현경은 일본 유학 중 1921년 3월 1일 히비야 공원 만세 시위를 벌이다 붙잡혔다. 동생 이선경의 비통한 소식을 구금상태에서 들었다. 귀국 후 여성단체 근우회 설립을 주도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교동 향교로 가다 보면 수원시 가족여성회관 건물이 말을 건다. 그 안에 들어서면 용담 안점순 할머니 흉상을 만난다. 그녀는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다. 일제강점기 때 여자아이들은 다 모이라는 동네 방송에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가 처참한 생활을 했다. 겨우 열네 살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3년을 지냈다. 전쟁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 평생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고 살다가 세상에 나왔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위안부 문제를 세상에 공개할 때였다. 안점순 할머니는 어린 날 끔찍했던 기억을 딛고, 평화와 인권을 전파하는 활동가로 살았다. 노구를 이끌고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꿨다. 일본의 만행을 구체적으로 알리고, 일본의 직접적인 사과를 듣기를 희망했다. 그녀는 평화활동가 안점순으로 수원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나혜석도 수원에서 빛나는 인물이다. 신풍로 45번길에 '나혜석 생가터' 비석이 있다. 골목에는 나혜석 관련 작품이 벽화로 새겨져 있다. 수원 삼일여학교에서 공부했는데 매향중학교의 전신이다.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 역사관에는 '자랑스러운 매향인'으로 졸업생 나혜석을 기리고 있다. 수원시립미술관에도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여인초상)과 김우영 초상이 있다.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 수원박물관에 '수원의 근대 인물' 사진.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다. 여성들이 많이 보인다. 나혜석은 수원 화성 주변에서 컸다. 늘 화성의 아름다움을 봤다. 학교 다니면서 수원천 자연환경으로 마음을 채우고 다녔을 것이다. 이런 곳에 살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고, 최초의 현대 여성 화가가 됐다. 여성으로서 조선 최초로 세계 일주 여행을 했다. 남성 중심사상이 견고한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하기도 했다. 여러 면에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었다. 수원박물관 2층에 '수원의 근대 인물'이라는 코너가 있다. 여기에 차인재(독립운동가), 최경창(사회운동가), 홍종례(사회운동가), 문봉식(독립운동가), 전현석(독립운동가 임면수 부인), 김몌례(교육자), 최순애(문학가), 이그레이스(의료인) 등의 사진이 있다. 흑백 사진이지만 모두가 눈빛은 굳은 신념과 의지로 반짝인다.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자랑스러운 인물들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바람이 따뜻하게 분다. 마음의 문도 열린다. 사회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들이 마음에 들어온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 매일 걷는 길에 그들이 살다간 흔적이 꽃처럼 남아 있다. ![]() 연관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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