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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역사 속 말이 이끈 길 그리고 남은 자리
말띠해에 말과 함께 한 기억을 따라 느리게 걷는 여행
2026-01-05 12:08:25최종 업데이트 : 2026-01-05 12:08:24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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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박물관에서 정조대왕이 말을 탄 모습을 볼 수 있다. 새해 추위에도 화성행궁 광장은 비어 있지 않았다. 아이의 손을 잡은 가족, 사진을 남기려 잠시 멈춘 연인, 산책을 즐기는 어르신들이 각자의 속도로 새해를 즐기고 있다. 광장 건너편에 걸린 현수막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를 한다. 순간 말도 뛰어나온다. 그렇다 인사 첫머리에 말을 그려놓았는데, 현수막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며 말이 뛰는 듯한 착각을 불러오게 한다. 순간 발밑을 보니 광장 바닥에 무예24기 그림이 있다.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마상기창'이다. 금방이라도 뛰어갈 역동적인 모습이다. 무예24기는 조선 정조 때에 펴낸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무예로 여기에 마상 무예도 있다. 수원시의 향토유적 제21호로 2007년 6월 3일 지정되었다. 광장에서 말 그림을 보는 순간 정조대왕이 떠올랐다. 말을 타고 온 모습이 보고 싶었다. 화성박물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2층 상설전시장에 정조대왕이 말을 탄 모습을 본다. 황금빛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 있는 정조대왕이다. 을묘년(1795년)에 창덕궁에서 수원 화성을 거쳐 현륭원(융릉)까지 왔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 회갑 기념 및 화성 축성 점검을 위해 8일간 진행됐다. 호위 인원이 약 6천3백 명이었고, 말은 700필이 넘었다(능행반차도에는 사람 1,779명과 말 779필을 그림). 화성행궁 광장에 무예24기 중 하나로 '마상기창'이다. 정조대왕의 수원화성 행차는 단순히 어머니 잔치와 현륭원 참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임금으로서 꿈과 개혁의 뜻을 백성에게 알리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융복(군복)을 입고 온 정조대왕 화성에 입성하기 전에 강력한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갑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때 황금 갑옷은 왕권의 위엄만이 아니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 백성을 향한 다짐이 함께 담겨 있었다. 정조대왕이 말을 타고 수원화성에 천천히 들어서는 순간을 상상한다. 정조의 시선은 곧게 뻗은 성곽과 장엄하게 솟은 문루를 향해 있었다. 긴 여행에도 말은 지치지 않았다. 성곽을 들어서면서 말발굽은 묵직했고, 히힝 소리는 높게 울렸다. 그 울림은 마치 왕의 결심을 알리는 신호처럼 성안으로 번져 갔다. 말 위에 앉은 정조대왕은 흔들림이 없었고, 두 손에 쥔 고삐에는 조심스러움과 단단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바람이 황금갑옷 자락을 스치자, 빛은 사방으로 일렁였다. 정조대왕의 모습은 군주라기보다 시대를 이끄는 상징에 가까웠다. 빛나던 황금은 힘의 과시가 아니라, 역사적 사명을 다하는 임금의 각오가 드러난 순간이었다. 화성행궁 홍살문 앞에 하마비. 말을 탄 군주도 내려야 하는 곳이 있다. 신풍루 앞 홍살문에 하마비다.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말에서 내려야 한다. 말에서 내려 걸어가는 것이 이들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자 예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화령전 외삼문 앞에도 하마비가 있다. 의왕에서 수원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지지대 비각이 있다. 이 비각에 오르는 계단 아래에 하마비가 서 있다. 수원향교 입구 홍살문 왼쪽에도 하마비가 있다. 영화동도 말과 관련이 깊다. 화성신도시를 건설하고 팔달산 주변 지역을 남부와 북부로 나눴는데, 북부 지역이 영화동이다. 정조실록(정조 20년 8월 29일, 1796년)에 의하면 "양재역을 영화역으로 고치고 우치를 화성 북문 밖에 옮겨 설치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영화동은 이 영화역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영화동은 지역 활성화를 위해 영화역 복원 고유제를 지내기도 했다. 동네에도 좁은 골목길에 '영화 옛길'이라는 벽화에 가 있고, 말이 역동적으로 뛰는 모습이 그려 있다. 하지만 영화역은 현재 정확한 위치는 추정하기 어렵다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정조는 역사적 신도시를 만든 후에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경제의 원동력인 양재역을 화성으로 이전한다. 이것이 영화역이다. 당시 역참은 공문서 전달, 관리들의 숙박 및 운송 수단 제공 등의 구실을 했으며, 여기에 필수적인 이동 수단인 말을 관리했다. 실제로 역사 기록화인 '영화역도(迎華驛圖)'에는 역관 뒤에 들판에는 말 10마리가 묘사되어 있다. 영화동 설명 글에 역의 말을 관리하던 영화역이 있던 지역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역사적 맥락과 거리가 멀지만, 광교공원에 강감찬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원래 팔달산에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애국 조상 건립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 전국에 위인의 동상을 세웠다. 세종대왕, 이순신 동상 등이 그때 만들어졌다. 그런데 지방에도 세우다 보니 수원에 강감찬 장군이 배정됐고, 그때 팔달산에 세웠다. 성신사 복원을 하면서 동상을 광교공원으로 이전했다. 강감찬 장군의 말 탄 동상은 한순간의 움직임을 영원히 붙잡아 둔 모습이다. 앞발을 높이 들고 막 도약하려는 찰나에 멈춰 있다. 말의 근육은 전투를 앞둔 기세가 서려 있다. 금방이라도 소리를 내며 전장으로 뛰어들 태세다. 말 위에 앉은 강감찬 장군도 허리를 곧게 세운 자세에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느껴지지 않는다. 갑옷 안에 옷자락은 바람에 휘날리고, 한 손은 자연스럽게 뻗어 앞을 가리킨다. 그 손끝에는 명령과 결단, 그리고 승리를 향한 확신이 담겨 있는 듯하다. 광교공원에 강감찬 장군 동상 강감찬 장군은 고려를 침입한 10만 대군의 거란을 물리친 영웅이다. 강감찬 장군 동상이 애초에 수원의 역사와 관련이 없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다. 장군이 지녔던 용기와 지혜, 그리고 나라를 지키려는 굳센 의지를 상징하는 기념물이다. 이제는 우리가 수원의 기념물로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수백 년 전 정조대왕 능행차 반차도에 말과 사람이 함께했던 숨결을 상상해 본다. 당시 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역사는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다양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다. 말띠와 관련된 역사 흔적은 단지 유물과 유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넘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우리들의 생활과 마음속에 이어지고 있다. 말띠와 관련된 역사적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은 마치 오래된 이야기책 속 한 페이지를 천천히 넘기는 듯한 여운을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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