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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독립운동가’로 다시 기억하는 이름 이선경·김향화
항일의 숨결이 남은 역사의 현장을 따라가 보다
2026-03-03 11:06:57최종 업데이트 : 2026-03-03 11:07:24 작성자 : 시민기자 윤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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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는 입구에 산우리 영웅들 표지판. 이선경 지사 이야기가 있다. 국가보훈부에서 '3월의 독립운동가'로 이선경, 조화벽, 김향화 독립지사를 선정했다. 이들은 이름조차 낯선 듯하지만, 일제의 식민 통치에 항거해 당당히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당시는 여성에게는 사회적 제약이 심했다. 그런데도 나라를 위해 총과 칼의 무력 앞에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단순한 기념을 넘어, 그들의 삶을 국민과 함께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26년 3월 1일. 3·1 독립운동이 107년이 지난 해다. 까마득한 해가 흘렀으니 그때 일이 잊힐 만도 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날만 되면 가슴에 태극기를 흔들며 그날의 함성을 듣는다. 특히 올해는 '3월의 독립운동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선경(1902~1921, 애국장 2012)과 김향화(1897~미상, 대통령 표창 2009)가 선정되어 반가움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은 암울한 시대에 수원 사람들의 마음에 독립의 불씨를 지폈다. 그 이름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자랑스러운 독립지사로 영원히 가슴에 남았다. 항미정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 표지판. 이선경은 3·1독립운동 이후 구국민단 활동을 했다. 2월 말이지만 바람은 아직도 차다. 두 지사의 자취를 따라가 본다. 수원행궁을 나와 에서 우측으로 걸으면 공방 거리에 들어선다. 이 길을 걷다 보면 팔달산 서장대에 오르는 입구가 나온다. 여기에 '산우리 영웅들'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표지판에는 이선경, 박선태, 김노적, 이현경의 사진과 업적이 쓰여 있다. 이선경은 얼굴 사진 대신 꽃이 그려있다. 이곳 향교로와 매산로 주변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시가지가 형성됐다. 수원역에서 가까운 곳이니 관공서가 들어오고 자연스럽게 일본 사람들이 많이 정착했다. 그 과정에서 일제는 조선인을 탄압하고 약탈을 일삼았다. 그때 우리 젊은이들은 매일 식민지의 참혹한 현실을 봐야 했다. 결국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은 일제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민족의 아픔을 극복하고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독립운동에 나선 것이다. 표지판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이 이곳 사람들이다. 이곳은 화성 화양루 아래에 있어서 산루리(지금의 중동, 영동, 교동 등 팔달문 밖 마을)라고 했다. 수원 시청 입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이선경과 김향화 지사. 이선경도 산루리 출신이다. 1918년 수원공립보통학교(현 신풍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숙명여학교로 진학했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난 해에 서울에서 학생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구속되기도 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로 전학했지만, 졸업하지 못했다. 1920년 구국민단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결석일이 많아 퇴학 조치를 받았다.
만석거가 있는 항미정에 가면 경기도 항일 독립운동 유적으로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 표지판이 있다. 구국민단은 '조선의 독립과 수감된 독립운동가의 가족을 구조하는 것이 목표'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도 이선경의 이름이 보인다. 3·1독립운동 이후 구국민단 활동을 했다. 상해로 가 임시정부의 간호부가 되어 독립운동을 도울 계획이었다. 1920년 8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활동하던 중 박선태, 이득수, 임순남과 함께 체포됐다. 구류 8개월 만인 1921년 4월 12일에 석방되어 수원 집으로 돌아왔지만, 9일 뒤 세상과 이별했다. 일제의 폭력적 고문 때문이었다. 그때 나이 19살이었다. 조국 독립을 염원하다가 겨레의 꽃이 됐다. 화성행궁 봉수당. 일제강점기에 자혜의원으로 여기서 위생 검사를 받던 기생들은 일본 경찰을 향해 저항했고, 이때 선두에 김향화 지사가 있었다. 수원 시청 입구 '명예의 전당'에 가도 이선경과 감향화를 볼 수 있다. 이선경은 수원의 유관순으로 부른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향화 지사도 여기에 있다. 일제의 총칼에 맞선 의로운 기생이라는 수식어가 있다. 수원 사람들이 사랑하고 자부심을 느끼는 독립지사들이다. 김향화는 화성행궁에 가면 기억할 수 있다. 1919년 3월 29일 기생들이 자혜의원(지금의 봉수당)으로 위생 검진을 받으러 가던 날이다. 기생들은 일제의 보건 정책이 부당하다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곳은 바로 수원경찰서가 있었다. 기생들은 일본 경찰을 향해 저항했고, 이때 선두에 김향화가 있었다. 김 지사는 결국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서대문 형무소 8호 감방에 갇혀 있었는데, 17살 소녀 유관순도 함께 있었다. 수원박물관에 이선경과 김향화 지사. 발길을 돌려 수원박물관으로 간다. 상설 전시 공간에 '수원역사박물관'이 있는데, 근대 수원 100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그중에 '수원의 근대 인물' 코너가 있다. 수원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들과 문화예술 교육, 종교인 등 근·현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여기도 이선경 지사와 김향화 지사가 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던 임면수, 민족대표 48인으로 수원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김세환 등도 소개하고 있다. 벽면에 크게 사진과 업적을 소개하고 있는데, 키오스크로도 살펴볼 수 있다. 수원의 3·1독립운동은 화홍문 방화수류정에서 시작되었다고 쓰여 있다. 일제의 수탈과 민족적 차별에 맞서 외친 '대한독립 만세' 함성은 4월 중순까지 수원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종교인, 유학자, 농민, 학생, 상인 그리고 기생들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수원박물관 '수원의 근대 인물' 코너. 수원 독립운동가들과 문화예술 교육, 종교인 등 인물들을 키오스크로 살펴볼 수 있다. 3·1독립운동은 온 국민이 함께한 거대한 저항이었다. 불꽃처럼 번져간 만세의 물결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민족의 의지를 온 세상에 드러냈다. 나아가 제국주의의 압박 속에 놓여 있던 세계 여러 약소국가에도 자주와 독립의 희망을 일깨운 역사적 외침이었다. 이러한 역사의 축적이 있었기에 우리는 마침내 해방의 날을 맞을 수 있었다. '3월의 독립운동가' 선정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이선경 지사와 김향화 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긴다. 그들이 남긴 용기와 결단, 나라를 향한 뜨거운 헌신은 우리를 일으켜 세운 역사로 살아 있다. 그러나 기록 한 줄 남기지 못한 채 스러져간 수많은 선열도 있었다. 이들 모두의 희생이 우리가 누리는 오늘의 일상 속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 뜻을 오늘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다짐한다. 그것이 정신의 계승이며, 진정한 추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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