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려도 괜찮아! 희망을 노래하는 기적의 청년”
수원시민표창 주인공, 수원시장애인합창단 박모세 단원
2022-02-08 11:15:54최종 업데이트 : 2022-02-08 13:52:52 작성자 : 편집주간 e수원뉴스 송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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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수원시 시민표창 주인공 박모세 씨와 그의 어머니 조영애 씨(사진=주인공 제공)
임인년 새해 수원시 첫 행사인 '시정발전 유공 시민표창 수여식'이 지난 1월 3일 수원시청 대강당에서 열렸다. 시정발전에 공을 세운 시민들을 초청해 표창을 수여하는 행사로 약 200여명의 수원시민이 자리를 빛낸 날이였다.
이날 행사장으로 천천히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긴 청년과 어머니가 눈에 띄었다. 수원시장애인합창단원으로 활동하며 세상에 희망을 전파하는 청년 박모세(31세) 씨와 그의 어머니 조영애 씨다.
박모세 씨는 수원시장애인합창단원으로서 장애를 극복하고 문화예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온 공로를 인정받아 시민표창 주인공으로 선정되었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 그의 어머니와 만나 모세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5살에 첫 말문이 트인 아이, 수원시장애인합창단에서 날개를 달다.
모세 씨에게 수원은 특별한 곳이다. 수원에서 태어나 최근까지 거주한 수원 토박이이자 수원시장애인합창단 덕분에 노래 재능을 마음껏 펼쳤기 때문이다.
그에게 노래는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창구다. "모세가 보기와 다르게 장애가 심하고 인지능력이 떨어져요. 모세가 노래한다고 하니깐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장애가 별로 없는 줄 알죠." 모세 어머니의 촉촉해진 눈동자에서 그간 힘들었던 세월이 느껴졌다. "모세는 건강상 작은 변수도 조심스러워 아직 코로나 백신을 맞지 않았어요. 오늘 인터뷰에 동행하지 못해 저만큼 아쉬워했네요." 그녀의 말처럼 모세 씨는 지체장애, 지적장애, 시각장애 및 청각장애 등 여러 중복장애를 안고 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는 5살이 되어서야 첫 말문을 텄다. 그 뒤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듣는 대로 기억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앵무새'라 불렀다. 집 근처 다녔던 교회에서 어린 모세는 노래를 접하기 시작했다. 어눌한 말투와 느린 행동에도 노래할 땐 자신감이 넘쳤다.
"노래 부를 때가 제일 재밌어요." 노래 이야기만 나오면 그의 눈빛은 세상 가장 밝은 보석이 된다고 한다. 그는 2006년 제 3회 수원시장애인가요제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이듬해 대상을 차지했다. 역대 대상 수상자들만 모아 열었던 왕중왕 가요제에서도 대상을 거머쥐었다.
모세 씨가 노래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것은 2005년부터 함께 했던 수원시장애인합창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합창단 활동이 처음부터 수월했던 것은 아니다. 합창을 하려면 박자를 제때 맞추고 단원들과 어울려 화음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괜찮아 모세야, 지금처럼 자신 있게 노래 불러. 우리가 모세에게 맞춰보자." 각자 다른 장애를 안고 사는 단원들은 마치 내 가족처럼 모세를 보듬었다. 모세는 화음을 맞춰갈 때마다 세상과 어울리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갔다.
"합창단은 모세를 온전히 부탁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에요. 노래뿐 아니라 아이를 온전히 보살펴 주시니까요. 대소변 실수를 하더라도 내 아들처럼 내 동생처럼 챙겨주는 단원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수원시장애인합창단 박동준 회장 및 이원희 지휘자, 모든 단원들은 모세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모세 씨 가족은 최근 다른 지역으로 이사했지만 여전히 수원시장애인합창단 소속이다. 합창단은 코로나19로 인해 2년째 활동을 중단했지만 활동이 재개되면 언제든 마이크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다.
(오른쪽부터) 수원시 시민표창 주인공 박모세 씨와 그의 어머니 조영애 씨(사진=주인공 제공)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그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건 지난 2013년 평창 겨울 스페셜올림픽 현장에 초청되어 애국가를 불렀을 때이다. 강원 용평돔에는 4,000여 명의 관객들이 현장을 가득 매웠고 전국에 생중계 되면서 그의 존재 자체가 희망이 되었다.
"모세와 함께 미국 12개주를 횡단했던 그 시절, 가장 힘들었지만 추억이 제일 많았어요." 미국에 거주하는 한 선교사가 평창 올림픽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모세를 인상 깊게 봤다며 연락해왔다. 우간다에 장애인학교 건립을 위해 모금 운동을 하려는데 모세와 함께 캠페인을 진행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렇게 2013년 미국 12개주 횡단이 시작되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한국과 생활시설이 달라 모세의 몸을 씻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머리 위 고정된 샤워기 때문에 머리를 감을 때마다 눈이 따가웠고, 쓰레기통에 물을 받아 머리를 감으며 불편한 몸을 간신히 붙잡기 일쑤였다.
하지만 장애에 굴하지 않고 노래하는 이 청년에게 언어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미국 현지인들이 모세를 보고 감명을 받았나봐요. 한 미국시민이 선교사를 통해 우리를 대저택에 초대했었어요. 우리에게서 희망을 느꼈다고, 오늘은 마음껏 쉬었으면 좋겠다고..." 이뿐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시장은 이들에게 명예시민증서를 수여했고, 이듬해 '세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유엔초청으로 뉴욕 유엔 회의장서 공연을 하는 기회도 생겼다.
태어나도 살 수 없다는 아이, 기적을 만들어간 가족
30년 전 그 날, 의사의 한 마디에 가족들은 망연자실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산모는 태아의 장애를 알고도 출산하기로 결심했다. 하늘이 내려준 생명을 함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어느덧 엄마 곁을 지키는 의젓한 30세 청년이 되었다.
가족은 모세 씨의 든든한 후원군이자 전부다. 모세 어머니는 다양한 음반을 구입해 어린 모세에게 매일 노래를 들려줬고 아버지는 기타를, 누나는 피아노를 치며 멋진 무대를 만들어주었다. 모세에게 집은 그야말로 노래가 절로 나오는 공연장이였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가 행복하다고 늘 되새겨요. 열 개를 가진 누군가는 자신에게 없는 한 가지 때문에 불행해하고, 어떤 이는 오직 한 가지에도 행복해하죠. 저에겐 모세가 전부에요." 어렸을 때부터 지속된 병원 치료에 경제적 부담과 육체적 피로가 쌓였지만 혹여나 모세 씨에게 힘든 감정이 전해질까봐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가족이다.
"사실 모세가 2년 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었었어요. 엎친데 덮친격으로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병원이나 응급실 방문조차 쉽지 않았죠. 방호복 입은 의사들이 뛰어다니면 모세와 저도 덩달아 불안에 떨었으니까요." 병명을 찾지 못해 이 병원, 저 병원 찾아 헤맨지 1년 후에야 원인을 알아냈다. 어릴적 뇌에 연결했던 호스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고장나 뇌수 흐름이 막혔던 것이다.
다행히 수술 후 건강을 빠르게 회복했고 올해 1월 수원시 시민표창 수여식에도 당찬 걸음으로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시민표창을 받은 모세 씨는 연습이라도 한 듯이 현장에서 감사 인사를 또박또박 전했다고 한다. "모세의 추억이 수원 곳곳에 녹아 있어요. 특히 수원화성과 행궁열차를 좋아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못간지 오래되었네요." 모세 씨 어머니는 올해 만 30세를 맞이한 그가 다시 수원시민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찾고 있다고 한다.
"엄마, 오늘 기자님 만난다고 안그랬어요? 꼭 안부 전해주세요." 오늘 인터뷰가 있다는 어머니 말씀에 모세 씨가 전한 말이다. 코로나가 종식되어 모세가 예전처럼 노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길 바란다는 모세 어머니의 두 눈가가 창밖의 비처럼 다시 촉촉해졌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