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리당의 '역사런투어' 마지막 날 모습
초여름의 싱그러운 바람이 감돌던 지난 5월 25일 오전 10시. 수원 창룡문 인근의 한 카페 앞으로 가벼운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원화성을 뛰며 이색적인 역사 해설을 듣는 '역사RUN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모인 10여 명의 시민들이다. 헤드 마이크를 착용한 채 참가자들과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이는 바로 '달리기 전도사'이자 수원시 홍보대사인 안정은 씨다. 지난 5년간 창룡문 인근에서 '달리당'이라는 에그타르트 맛집으로 소문난 '달리기 명소'를 만들기도 했다.

역사런투어는 화성을 배경으로 달리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수원에서 나고 자란 안정은 씨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SNS 팔로워 8만 7천 명을 거느린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힘든 시기 우연히 만난 달리기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주었듯, 더 많은 시민에게 달리기의 매력을 전하고 아름다운 수원화성을 알리고 싶어 몇 년 전 이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기획했다. 하지만 5월 25일의 레이스는 여느 때보다 조금 더 특별하고 뭉클했다. 지난 5년간 시민들의 소중한 사랑방이자 러너들의 거점이 되어주었던 카페 '달리당'이 문을 닫으며 함께하는 '마지막 역사런'이었기 때문이다.

창룡문 앞에서 준비운동을 하고...
남녀노소, 혹은 혼자나 가족, 친구, 커플 등 다양한 모습으로 모인 참가자 중에는 벌써 여러 번째 참여하는 '단골'도 많았다. 이틀 연속으로 참가한 다섯 살 꼬마 아이부터 임산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처음 참여해 숨이 차지 않을까 걱정하는 초보 러너들을 향해 안정은 씨는 "계속 뛰는 것이 아니라 100m, 300m씩 뛰다 멈춰 서서 역사 해설을 듣고 사진을 찍을 테니 안심하셔도 된다"며 따뜻한 미소를 건넸다.
창룡문 앞 푸른 잔디 위에서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시작한 단체 준비운동. 마침 성곽 뒤로 거대한 '플라잉수원'이 두실 떠오르며 시작부터 이색적이고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했다. 본격적인 발걸음이 성곽길을 따라 가볍게 이어졌다.

함께 달리는 즐거움, 동기부여의 시간
"화홍문은 수원천과 북쪽 성곽이 만나는 수문으로 '아름다운 무지개 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이렇게 안정은 씨의 생생한 해설이 더해지자 평소 이름만 알고 무심히 지나치던 성곽의 구조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성곽에 꽂힌 깃발 색으로 방향을 알 수 있다는 귀한 팁도 배웠다. 동쪽은 파랑, 서쪽은 하양, 남쪽은 빨강, 북쪽은 검정이라는 오방색의 비밀을 알고 나니, 방금 지나온 연무대 성곽의 파란 깃발과 화홍문 인근의 검은 깃발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모든 시작은 달리당이었다"… 삶이 바뀐 시민의 고백
달리기 도중 미술관 옥상으로 이어져 화성행궁의 탁 트인 전체 전경을 관람하는 숨은 스팟을 만끽하기도 하고, 행리단길에 새롭게 오픈한 '달리기 편집숍'에서 발을 측정해 운동화를 추천받는 러너들만의 꿀팁을 나누기도 했다. 장안문을 통과해 활기 넘치는 행리단길과 나혜석 생가터, 그리고 화성행궁 입구 광장을 지나는 동안 햇살은 뜨거워지고, 땀은 흘렀지만 끝까지 완주할 것을 다짐하는 서로의 마음이 전해져 힘들지 않았다.

2022년도 처음 시작한 달리기로 인생이 바뀌었다는 이재연 씨
이날 참가자 중 매탄동 주민 이재연 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2022년 처음으로 안정은 씨를 만나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이 씨는 이제 평범한 시민에서 울트라트레일러너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이재연 씨는 "2022년 처음 달리당에서 안정은 씨와 함께 달린 것이 인연이 되어 삶이 완전히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100미터도 제대로 뛸 줄 몰랐던 제가 이제는 100km 트레일 러닝을 뛰고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 웨이하이 100km 울트라트레일러닝 대회까지 다녀왔죠. 제 달리기 인생의 모든 시작이 이곳 '달리당'이었기 때문에, 오늘 마지막 역사런투어에는 꼭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공간은 문을 닫아 아쉽지만 저의 달리기 인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라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수원 행리단길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는 달리기 편집샵도 구경
경쟁이 아닌 '동지'를 만나는 시간, 달리기 인생은 계속된다
다시 창룡문 성곽길로 돌아오는 길, 도착지점 직전, 체력이 떨어져 지친 어린 참가자가 마지막으로 발을 내딛자 먼저 도착한 모두가 일제히 손뼉을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경쟁이 아닌 연대와 응원의 순간이었다.
한 참가자는 "역사 스토리를 재밌게 들으며 달리고 멈추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완주할 수 있었다. 혼자였다면 절대 못 뛰었을 것"이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참가자들은 달리당이 준비한 마지막 선물인 시원하고 건강한 음료를 마시며 시원섭섭한 일정을 마무리했다.

'달리당' 카페를 배경으로 마지막 역사런투어 사진을 남겼다
세계적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저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매일 달린다는 행위가 하루 세끼 식사나 수면, 집안일, 글 쓰는 일과 같이 생활 사이클 속에 흡수되어 갔다"고 말했다. 이날 함께 달린 시민들 역시 경쟁에서 1등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이웃과 동지가 되는 달리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든 듯했다.

엄마도 아이도 함께 하나된 시간
창룡문의 상징이었던 카페 '달리당'의 오프라인 공간은 아쉽게 마침표를 찍었지만, 러닝전도사 안정은 씨와 수원 시민들의 건강한 레이스는 멈추지 않는다. 안 씨는 다가오는 6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또 다른 도전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10분도 연속해서 뛰지 못해도 괜찮다. 나를 찾아가고 이웃과 발을 맞추는 수원화성 역사런투어처럼,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저마다의 속도로 달릴 우리 모두의 건강한 발걸음을 응원한다.